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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인터뷰

진정한 휴머니스트 글쟁이를 꿈꾸는 공존해바라기 곽지현 작가


"삶의 다양함을 지키고 이해와 인식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것이
 휴머니즘이라면, 다큐멘터리는 휴머니즘의 진지한 파수꾼이라 할 수 있다. - EDIF”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시리즈 2탄으로 지금 <SBS 스페셜> 막내 작가로 일하고 있는 곽지현씨.
진정한 휴머니스트 글쟁이를 꿈꾸며 이 세상의 모든 '낮은 목소리들을 대변'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곽지현씨를 만나봤습니다.


1.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 드립니다.
 


 

김종삼 시인의 시,


원석연 화백의 연필화,

한여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

그리고 영화 <물랑루즈>를 좋아하는 공존해바라기 곽지현입니다 



2.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이라면 고전이잖아요. 의외이세요. 어떤 고전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네요.


네. 전 고전을 좋아합니다. 
굵고 짧지만 격정적인 삶을 꿈꾸던 저에게 <폭풍의 언덕> 히스클리프는 과히 최고의 캐릭터이며, 때로는 캐릭터의 전형화가 한계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고전만큼 캐릭터가 확실한 - 햄릿, 돈키호테, 스크루지 등 - 소설을 현대 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비가 오든 캔디바같은 하늘이든 창 밖이 푸른 나무든 누런 나무든 상관 없이 한적한 장소의 창가에 앉아 시간의 향기가 더해진 고전을 읽고 있으면 온갖 상상력과 감수성이 살아 깨어 납니다.

소설 뿐 아니라 영화와 그림도 고전을 좋아합니다.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는 성격 급한 제가 유일하게 감동을 받는 느림의 미학이기도 하고 오손 웰즈의 철학적인 영화 구성은 표면적인 이야기의 재미 뿐 아니라 영화 한 편으로 인간사 축소판을 보는 듯해서 그 감동과 여운이 오래 참음만큼 기나깁니다.

그림 역시 애매모호함으로 둘러싸인, 진정한 '예술의 시대'가 끝난 시대의, 이름과 의미만 부여하면 모두가 예술이 되는,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무한한 가능성의 - 미디어 아트나 갖가지 퍼포먼스 등 참여 가능한, 백남준씨처럼 예술을 마치 게임처럼 즐길 수 있는 - 현대 예술보다는 적어도 20세기 초반까지의 그 예술이 더 끌립니다.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달달 외웠던 미술 사조에 속한 '고전'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수록 신기한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예술과 문학은 끊임없이 있었고, 시대마다 획기적인 도전 또한 계속 되었는데도 자꾸만 새로운게 탄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집념과 기술 진보로 인해 파생되는 새로운 소재와 이슈를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전 예술가들을 존경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술이든 상업 예술이든 격 높은 예술인 척, 고고한 척 하는 싸구려 가짜 예술가들일지라도 너무 좋으네요. 비록 고전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국문학도이자 인사동 갤러리 나들이가 취미이고, 멀티 플렉스 영화관이 요즘 저의 유일한 낙인 저는 현재 진행형 소설, 그림, 영화 역시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어린 시절 인형과 그림 일기>

3.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요?

저의 어릴 적 꿈은 피아니스트.
엄마가 30년 전 첫 월급을 받아 구입했다는 호루겔 피아노로 7살 때부터 13살 때까지 약 7년 간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손가락이 긴 편이고, 엄마가 종종 클래식 LP를 들려주신 덕분인지 제법 피아노에 소질을 보이던 저는 학급에서 풍금을 연주하기도 했고, 피아노 학원 선생님의 뒤를 잇는 교회 반주자 수업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채시라, 최재성, 박상원 주연의 <여명의 눈동자>를 인상 깊게 본 저는 드라마 주제곡을 악보 없이 귀에 들리는 대로 연주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제가 입으로 흥얼거릴 수 있는 가락은 악보를 보지 않고도 건반 위에서 구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교회 찬송가 악보도 거의 못 읽어 새벽기도회 반주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그만 두었고, 되돌아 봤을 때 예전에도 피아노를 뛰어나게 잘 쳤던 것은 아니었지만 10대 초반의 자타공인 절대음감 소녀에게 피아노라는 악기는 4분의 3박자 왈츠와 같은 꿈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역마살 - 여행]

4. 국토대장정을 두 번이나 하셨네요. 남들은 한 번하기도 어렵다는 국토대장정을 두 번이나 할 만큼 매력적이었고, 거기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궁금합니다.

국토대장정. 무엇보다 인연 때문입니다.
2004년 여름에는 일반 대원이자 기록영상팀원으로, 2005년 여름에는 준비 스태프이자 기록영상팀장으로 ‘한국국토평화순례단(20세상)’에서 주관하는 국토대장정에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2년 연속 국토대장정에 참가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첫 해 대장정을 완주하자마자 “내년에도 또 해야지!”라고 다짐했고, 그 다짐은 매우 자발적이었으며 강렬한 열망과 동의어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국토대장정을 해보면 생각만큼 어렵고 힘들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국토대장정의 ‘이미지’가 워낙 도전적이고 고되다 보니 주위에서는 대개 “왜 사서 고생해?” 라는 반응입니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국토대장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도전을 즐기는 젊은이’임을 반증합니다. 즉, 저는 국토대장정을 통해 ‘도전을 즐기는 친구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의 발에 생긴 물집을 만져주고, 그들의 강인한 손에 의지해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를 걸으면서 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 배려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는 진정한 관계 맺음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기억으로 돌아온 일상에서도 이전보다 좀더 인내하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인내심이 한계에 부딪힐 때에도 제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그들로 인해 저는 오늘도 떫고 어린 맛을 이겨내며 잘 익은 포도주로 무르익어갑니다.




5. 하얀 운동화와 찢어진 청바지로 20대 초반에 20개국 배낭 여행을 하셨는데, 그때의 에피소드를 듣고 싶습니다.

아! 너무 많은데… 다른 추억들에겐 적잖이 미안하지만 세 가지만 꼽아 볼게요.
 
아메리카의 선물 ‘Gift Of America’
 
2007년 2월, 앰트랙(AMTRAK)을 타고 한 달 동안 미대륙횡단을 하던 도중 ‘The California Zephyr(시카고-샌프란시스코,약 3일 소요)’ 안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입니다.
 
앰트랙 중에서도 변화무쌍한 경치를 자랑해 인기 노선인 ‘캘리포니아 제퍼’ 열차 안에는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승객이 있었습니다. 홀로 여행 중이었던 저에게 정치인의 꿈을 가진 대학생 트리스탄, 사발면을 건네주던 일본의 대학생들, 홀로 여행 중인 캐나다 아저씨, 유쾌한 흑인 승무원 아저씨, 흑인과 유대인 어린이들이 다가와 3일 내내 저를 웃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미국의 하얏트 호텔 등에서 약 두 달 동안 일하고 받은 돈으로 앰트랙 30일 패스를 구입하고 이 여행을 떠났던 제 수중에 돈이 많을 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차 안에서도 3일 동안 뉴욕에서 구입한 시리얼과 우유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우유가 다 상해버린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기차 안 매점에서 베이글을 사 먹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제 전 재산!
 
그야말로 제가 속해있던 칸은 난리가 났습니다. 친절한 흑인 승무원 아저씨는 캘리포니아 제퍼의 기장님 뿐 아니라 형사까지 모셔왔습니다. 형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던 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 웃게 만들었던 같은 칸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장님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때까지 기차 안의 매점과 식당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셨지만 제 분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갑자기 홀로 여행 중인 캐나다 아저씨가 다가 오셨습니다. 잠시 정차한 역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도 저를 위해 같은 칸 승객들과 십시일반을 한 달러를 제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한사코 받지 않으려던 저에게 그분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Gift Of America’.
 
그 순간 저는 제 손에 쥐어진 따뜻한 돈, 그 이면에 있는 진정한 ‘아메리카의 선물’을 깨달았습니다. 그건 바로 같은 칸에 있던 승객들, 그리고 그들에게 진심으로 열게 된 내 마음.            
 
이스라엘 키부츠의 천사
 
2006년 2월, 이스라엘 여행을 마치고 요르단으로 이동하던 도중의 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러시아 군인들의 도움으로 요르단 국경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퇴근 시간의 버스인 까닭에 버스 안 외국인은 저 뿐인 듯했습니다. 제 옆 좌석에 앉은 이스라엘 아가씨에게 언제 내려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부탁한 후 예루살렘 크리스챤 지구에서 노점을 접고 집에 돌아가는 어린 소년에게 받은 사과 하나를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저녁도 먹지 못한 저에게 마치 어린 예수님처럼 다가온 유일한 식량이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가장 배고픈 때인만큼 귀한 가치를 지닌 사과를 남에게 나누어 준 덕분이었을까요? 아니면 한 치 앞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과 달리 소년이 준 사과는 제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은 닫혀있었습니다. 늦은 밤 허허벌판의 저는 쉐켈마저 다 써버린 상황.
 
워낙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다합의 바닷가에서 노숙을 하는 등 노숙에는 이미 두려움이 없던 저. (참고로 몇 년 뒤 미국 대륙횡단을 할 때에도 보스턴에서는 하버드 대학교 빈 강의실에서 잠을 자고, 뉴욕 펜실베니아역에서 밤을 지새우며 노숙자 아저씨와도 친해졌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멀뚱멀뚱 쑥덕쑥덕 아시아 어딘가에서 온 작은 여자애를 쳐다보기만 하던 이스라엘 퇴근길 버스 안 사람들.
“I’m OK.” 라고 동양의 미소를 건네며 버스에서 내리던 그 순간, 옆 좌석 내 사과를 받은 그녀, 바로 이스라엘 키부츠의 천사가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비록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제외한다는 한계가 있는 공동조직인 키부츠이지만, 제가 하룻밤을 신세진 키부츠에는 ‘미국화’되지 않은 여유로운 이스라엘, 그리고 공동체의 삶에 의미를 두고 하루하루 정직하게 노동하고, 경쟁 없이 나누는 다국적 젊은이들의 ‘공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만난 두 번째 파라다이스 키부츠, 그리고 잊지 못할 천사! 천사를 만나 더욱 천국 같던 그곳을 기억하며 저 역시 우리나라를 찾아온 고맙고 소중한 외국인 한 명 한 명에게 천사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나이아가라 마을의 발렌타인 데이
 
역시 2007년 2월, 미대륙횡단 도중의 에피소드입니다.
뉴욕 할렘가에 자리잡은 째즈 호스텔에서 일주일 동안 묵고 있던 저는 참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습니다. 안쓰럽게도 독감에 걸려 일주일 내내 방 안에서 누워만 있던 룸메이트 독일 언니, 핀란드에서는 자일리톨껌을 씹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준 핀란드 오빠, 이어폰을 나누어 함께 제니스 죠플린의 음악을 듣고, 야밤에 차이나 타운에 함께 나가 구경하며 즐거워하던 뮤지컬 배우 지망생 앨리스, 주인 아주머니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거의 밤새 수다를 떨었던, 집안에서의 막내라 그런지 애교도 많고 참 유쾌하던 카타르 친구 요셉, 그리고 숙소와 메트로역을 오가며 친해진 노점의 흑인 형제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뉴욕에서 나이아가라 마을로 가는 기차를 타는 저를 만류했습니다. 폭설 때문에 나이아가라 폭포도 보기 힘들 것이며 비수기이기 때문에 문을 연 숙소나 식당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고집이 센 저는 꼭 나이아가라 마을에서 발렌타인 데이를 보내고 싶었고 결국 기차에 올랐습니다. 폭설 때문인지 반나절이면 도착해야 할 기차가 두 배는 더 느리게 움직여 한밤중, 눈이 무릎까지 쌓인 나이아가라 마을 기차역에 저를 내려주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때 그 역에 내린 사람은 저와 승무원 두 명 뿐.
 
다행스레 찾은 따뜻한 호스텔에서 유일한 손님이었던 저는 눈이 내려 동화 같은 나이아가라 마을에서 단잠을 잤고 다음날 아침 중국 출신 주인 아주머니와 일 도와주시는 아저씨와 함께 매력적인 죠니 뎁이 나오는 영화 <에드 우드>를 보며 발렌타인 데이의 아침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나이아가라 폭포로 향했는데, 청바지 하나 뿐이었던 저에게 주인 아주머니는 방수가 되는 빨간 바지와 도둑놈 모자(?)를 챙겨주셨습니다. 아마 청바지 위에 그 빨간 바지를 덧입지 않았더라면 저는 거의 허벅지까지 쌓인 나이아가라 마을의 길을 도저히 걸어 다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폭설이 내려 아무도 찾지 않은 나이아가라 폭포와 단 둘이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새하얗던 그곳에 존재하는 건 오로지 적막을 깨우는 폭포 소리와 숨 죽인 저. 그랬습니다. 비록 아무도 찾지 않을 때에도 폭포는 생명의 소리를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폭설이 내렸든 안 내렸든, 성수기이든 비수기이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폭포는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하게도, 통쾌하게도, 그리고 참 고고하게도 자신을 다 바쳐 쏟아 붓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꼭 슬플 때만 흘러내리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네팔에서 가장 총애했던 아이 산토시(Santoshi)와 함께>
 

6. 네팔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어린 아이를 만나고 나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삶의 변화가 있었나요?


네팔의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 사키나. 늘 웃는 사람이라는 의미.
지난 2008년 여름, ‘G마켓해외봉사단’ 이라는 이름으로 네팔 카트만두에서 약 2주 동안 네팔 초등학교의 벽화 그리기, 미술 교육 등의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떠나기 전에 네팔 언어도 배우고, 네팔 음식도 손으로 집어 먹어 보고, 프로그램 기획 및 준비도 했지만, 정작 일상의 불만족스러움과 불안감을 일 순위로 챙겨간 저.
 
이런 저에게 네팔에서 만난 아이들은 작은 것에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아는 모습으로 저를 반성하게 했습니다. 특히 자신의 진심을 다 주고도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쪼개어 선물을 주고, 밤새 아끼던 연필로 제 못난 얼굴 예쁘게 그려주던 아이들은 저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만을 보며 불만족스러워하던 저로 하여금 저보다 덜 가진 이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사람으로 살도록 이끈 원동력입니다.
 
사실 대학 졸업을 하고 거의 반 년이 지나도록 백수로 지내던 저는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학창시절에 꾸준히 해오며 저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선하게 진화하도록 만들어준 봉사활동의 감동도 잊은 부정적인 에너지 덩어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를 부모님 다음으로 가장 많이 생각해주는 이의 추천으로 ‘G마켓해외봉사단’에 도전하게 되었고, 네팔에 가게 되었고, 네팔의 아이들을 만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통했습니다. 진심을 다해 아이들을 안아주고, 목이 쉬도록 아이들의 꿈을 사랑한 저에게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은 바로 ‘사키나(Sakina)’. 알고 보니 ‘늘 웃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찡그리기 쉬운 바쁜 방송국에서도 늘 웃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팀의 피디분과 AD선배도 저에게 ‘늘 웃고 다닌다’라고 얘기해주시더군요. 잃었던 미소를 되찾아 준 네팔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삶의 진정성, 그리고 감사함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것입니다.
 


 

7. 곽지현씨한테 여행은 ‘아름다운 역마살’이라고 할 수 있네요. 자기 나름대로의 여행의 비법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앞서 여행 에피소드에서 이미 눈치 채셨을 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여행은 ‘만남’입니다. 다른 문화와의 만남이자 저 자신과의 재회. 특히 자존감이 낮은 저에게 여행은 저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계기를 주고, 일상에서 ‘배려’ 혹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는 이름으로 남의 시선에 저 자신을 가둔 감옥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하니 여행이 없다면 저는 아마도 무기 징역수와 다름 없는 삶을 살고 있겠죠.  
 
여행의 비법 중 하나는 ‘무조건적인 믿음’ 입니다. 특히 홀로 여행을 하다 보면 사기를 당하기 일수입니다. 하지만 약 20개국을 여행하며 점점 더 확신하게 되는 것은 ‘사람을 믿는 만큼 얻는다.’는 점입니다. 즉, 내게 다가오는 인연과 기회를 뿌리치지 않아야 인연이 기회로, 기회가 인연으로 불꽃 터지듯 팡팡 터집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믿어서 배신을 당한 경우도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으로 남으니 믿음, 다른 말로 ‘오픈 마인드’는 여행의 비법인 동시에 선물 아닐까요?


8. 이번 인터뷰를 보는 분들이 영어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듣기로 곽지현씨는 남들은 다 다녀오는 어학연수를 한번도 안 갔는데, 영어를 잘한다고 듣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요?


잘 하지는 못합니다. 어학연수 역시 다녀오고 싶었지만 사정상 포기했고, 대신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미국에서 세 달간 머무르며 해외 인턴십을 했습니다. 앞으로 방송작가 일을 하다가 뉴욕이나 네덜란드에서 영상과 다큐멘터리 공부를 더 할 계획은 갖고 있습니다.
 
저는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외국어를 사용하는 나라와 인연을 맺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학교 때 교양 수업으로 일어, 중국어, 스페인어를 배웠고, 독학용으로 아랍어와 프랑스어 교재도 집에 사두었죠.
 
사실 방송국의 막내작가를 하면서 자기 계발을 할 시간이 없는 것에 가장 안타깝습니다. 특히 여행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5개 국어를 하고 싶은데, 자기계발 시간이 없으니 5개 국어는 물론 영어조차 멀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틈틈이 EBS 라디오 영어 방송을 듣고, 국내 뉴스보다는 CNN을 시청하고, BBC 다큐멘터리를 자막 없이 보면서 영어를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영어만큼은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어렸을 때부터 외국 경험과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현명한 어머니의 공이 가장 큽니다. 언어는 꾸준히 열심히 해야죠 뭐.
      



 


[휴머니스트 글쟁이 - 꽉작가]


9. 목걸이처럼 펜을 달고 다니시는데, 어떻게 방송 작가를 하게 되었나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자연스레 메모광이자 일기광이 되어 펜을 목걸이처럼 달고 다녔고, 막연히 방송국을 동경하고, 언론인의 ‘카파이즘’을 실현할 수 있는 분야는 다큐멘터리의 진정성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방송 작가의 출발선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10. 많은 대학생들이 지금도 방송작가를 꿈꾸고 있습니다. 방송작가는 어떻게 되고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요?


일단 방송작가가 어떻게 되는지부터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공채 때 뽑지 않고 수시로, 특히 일 년에 두 번 있는 개편 기간 때 3사 구성작가협의회의 구인 구직을 참고해 지원하시면 됩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한 후 PD님이나 메인 작가님의 면접을 보고 선발되는데, 영어와 컴퓨터를 잘하면 조금 유리한 편입니다. 처음에는 ‘막내 작가’ 혹은 ‘보조 작가’라는 이름으로 아이템 조사 및 자료 조사를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작가가 될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지원 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 방송이란 사람이 사람을 주제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기본적으로 사람에 관심이 있다면 가장 훌륭한 자격 조건을 갖춘 것이라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체력이 좋고 꿍하지 않는 성격이라면 더 유리할 것 같습니다.


11. 정말 멋진 결정이시네요. 사실 자신의 길을 확신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곽지현씨만의 자신의 길을 가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말하면 ‘타인의 고통’입니다.
저의 모순과 무력감을 떨쳐내고, 늘 잊지 않아야 할 우선 순위, 즉 제 비전의 전제는 바로 타인의 고통입니다.
 
대학 시절의 민주언론시민연합, 인권운동사랑방, 다함께 이화여대 모임의 맑스주의 포럼 참여와 나눔의 집 방문, 그리고 청년의 양심과 인간의 선한 본능을 건드리는 다큐멘터리들과의 만남.
그 뜨거웠던 순간들. 매 순간 실재하는 타인의 고통, 매체를 통해서든 직접 만났든 그 고통과 마주했을 때의 무거움.
 
그 순간들과 무거움을 진심으로 잊고 싶지 않아, 잃고 싶지 않아서, 비록 끝도 없고, 답도 없는 것 같아 고민만 하는 자신이 무력하고, 또 너무나도 망각하고 살아가는 제 자신이 답답해서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고 싶은 열망으로 저는 오늘도 제 길에 타인의 고통을 짊어지고 가려 합니다. 




12. 곽지현씨에게 있어 다큐멘터리는 무엇이고 어떤 다큐를 만들고 싶나요?


다큐멘터리는 ‘타인의 고통’을 짊어진 채 그 무거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동시에 가벼워지게 만드는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유일한’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그것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진리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제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답을 내리기보다는 질문하는 다큐멘터리, 결국은 질문 그 자체가 답인 그런 다큐멘터리.
  
그리고 또 만들고 싶은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하나는 서로 다른 개인 혹은 문화가 충돌하지만 결국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또 하나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사유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들릴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의 다큐멘터리만큼은 꼭 만들어낼 것이고, 이것들이 구체화되었을 때 불완전한 제 자신이 자기 모순을 극복하고 세상 속에서 조금은 가벼워지길 바랍니다.



13. 자기를 소개할 때 공존 해바라기라고 하셨는데, 곽지현씨한테 ‘공존’은 무엇인가요?

말 그래도 함께 사는 것.
‘독존’도 아니고 ‘공멸’도 아닌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소중한 나의 보물 지도 - 다큐멘터리나 책을 보고 정리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14. 곽지현씨의 꿈은 무엇인가요.

비록 아직은 막내 작가이고 배우는 과정이라 ‘작가’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합니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공존’의 메시지, 그리고 진정성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세상과 공유하여 제가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과 인간에 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동시에 한비야님처럼 가슴 뛰는 일들에 쉼 없이 도전하고, 이를 책으로 남겨 또한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또한 영화 <바그다드 까페>와 만화 <호텔 아프리카> 그리고 임진각에 있는 ‘까페 안녕’과 같은 곳에서 책과 음악, 그리고 여행의 흔적과 담백한 만남이 있는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교양이란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다.' '진정한 나눔이란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는 것이다.'
라는 말을 늘 되새기며 사람, 자연, 문화를 사랑하겠습니다.  




15. 대학생들에게 한마디 부탁 드립니다.
 
근 20년간의 학창시절에 마침표를 찍고 사회인이 된 지도 어느덧 일 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런데 아직도 제 자신을 ‘학생’으로 부를 때가 종종 있습니다. SBS에 첫 출근 하기 전 홀로 떠난 단양 여행 도중 한 식당에서 저 자신을 학생으로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학생으로서 살아온 20년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 그리고 학생이라는 특권을 아직은 놓아 버리고 싶지가 않아서였겠죠? 사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몇 번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고 외출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어린 피터팬이 감히 대학생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첫째, 대학생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배낭여행(국제학생증), 연극 공연 티켓 등 꼭 활용하길. 그리고 ‘참가 자격 : 대학 재학 중’ 인 국내외 봉사활동, 해외 체험, 강연 및 포럼 등 닥치는 대로 도전하고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로운 학생의 시간을 경험에 투자해 무엇보다 자신 안의 넓은 세상과 조우하길 바랍니다.
 
둘째, 전공 수업 이외에 관심 분야, 타전공 하나씩, 특히 문과라면 이과나 예체능쪽 전공을 꼭 들어보길.
문학, 사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 수업은 필수. 인문학이 곧 경쟁력이며 효육적인 학문 아닐까요. 나 자신을 바로 알아야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수많은 가치들 중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으니까요.
 
셋째, 시적인 삶.
“좋은 시는 쉽게 쓰여지는 게 아니다. 시는 저자 거리에 있어야 한다. 남루하고 고달픈 삶을, 그러나 초라하게 쓰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수강한 시 수업 종강 날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혹자는 “대학교 4학년이 한가롭게 시나 배우고 있나?” 라고 코웃음 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게 아니라 ”대학교 4학년이기 때문에 더더욱 시를 배워야 한다.”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마지막 ‘시적인 삶’에 대한 저의 한 마디는 제 나름대로의 상징이며 은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비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저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사회인보다 더 쉽게 인생의 순수한 시인이 될 수 있는 대학생 후배님들.
부럽습니다!




씨앗 프로필


  이름 : 곽지현
  소속 : <SBS 스페셜> 막내작가
  이메일 : windlove916@naver.com 
  가장 좋아하는 말 : 교양이란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다.


:: 유니멘토 인터뷰팀 2009. 1. 20 일자